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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야
2004.04.06 17:15

[펌] 어린 군자들의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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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경하는 선배 누님의 강의까페에서 퍼왔습니다



[어린 군자들의 선거]

그저께 저녁, 딸아이가 슬쩍 흘린다.

"나, 회장 됐어."

왠지 쑥스러운가보다.

"어? 너네 반 회장? 잘 됐네. 축하한다."

그리고 나도 잊었다.

잠시 후 밥상머리에서 그 얘기가 불현듯 생각났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좋아하실 얘기인지라, 나도 슬쩍 흘렸다.
(어른들 앞에서 제 자식 자랑하는 게 아직도 어색하다.)

"연이가 지네 반 회장 됐대요."

"응? 그래? 아이구. 잘 했다. 장하다. 내 손녀."

역시 내 반응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어지는 어머님, 아버님의 질문에 아이의 입은 열리고, 선거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우선 전체 학급 인원은 40명.
40명의 아이들이 제비뽑기를 해서 자신이 후보로 나갈 달을 정하는데, 한 달에 후보가 네명씩 나온단다.
결국 모든 아이가 한 번씩은 후보가 되보는 셈.

게다가 그 후보는 모두 임원이 된다.
여자 회장, 여자 부회장, 남자 회장, 남자 부회장을 뽑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모두 2번의 투표권을 행사하여 여자와 남자 임원을 뽑는다.
남자도 여자 임원을 뽑고, 여자도 남자 임원을 뽑는 것이다.

회장과 부회장은 어떻게 정해지냐는 질문에 대한 딸아이의 답.

"투표해서 단 한표라도 많은 사람이 회장이 되는 거야. 적은 사람은 부회장이 되고. 만약 표가 똑같으면 한 번 더 투표하고."

명쾌했다.


뭐라고 유세했냐는 질문에 쑥스럽다며 이리저리 빼던 딸아이에게 아버님은 넌지시 미끼를 던지셨다.

"회장이 되면, 떠드는 아이들 이름 적어서 선생님께 보여드린다고 했니?"

"아휴. 그럼 누가 찍어줘요?"

그렇지. 유권자를 협박하는데, 누가 찍어주랴.

"그럼 회장 되면 아이스크림 하나씩 돌린다고 했니?"

"그건 뇌물이예요!"

하얗게 흘기는 녀석.
우리는 박장대소.

"전 그냥 봉사하겠다고 했어요. 반을 위해서, 선생님 도와서 열심히 하겠다고."

흐음. 3학년 치고는 너무 바른생활 어린이 아닌가? 조금 걱정됐다. -_-;;
40명 투표에 39명의 지지로 당선되었다는 손녀가 못내 자랑스러우셨든지 어머님은 아이를 떠보셨다.

"그럼 부회장은 한 표 받은 거네?"

"예."

"아이고. 그 아이는 기분이 안 좋았겠다."

"......"

"연이, 인기가 좋네. 나중에 국회의원하지 그러냐?"

"싫어요!"

"왜?"

"테레비보면 못된 짓만 하던데요. 그래서 전 검사한다고 했잖아요. 그런 사람들 잡아넣을 거예요."

어머님은 매우 기뻐하셨지만, 난 왠지 서글퍼졌다.

아이들의 정치 수준에 못미치는 어른들의 정치 현실.
그 어른들을 보며 시나브로 배우는 정치 혐오.
게다가 그 어른들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모두 아름다운 정치를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난 우리 아이의 회장 당선을 무턱대고 좋아할 수 없었다.



아. 막내 녀석의 명언을 빼놓을 수 없다.

"근데... 투표가 뭐야?"

"응. 종이에 좋아하는 사람 이름 적어내는 거야."

둘째가 제 나름대로 친절한 설명을 보탠다.
그에 대한 막내의 해석.

"아하. 제비뽑기구나."

녀석이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를 알 리 만무하건만, 녀석은 민주주의의 핵심을 찔렀다.



그래.
언젠가는 딸아이의 선거처럼 모든 이들에게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고,
막내 녀석 말처럼 제비뽑기로 대표를 뽑을 수 있겠지.
교양있는 시민이 공교육을 통해 길러지고, 그렇게 자라난 상식적인 시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정치가 단순해지는 날이 오겠지.

君子들이 사는 小國寡民의 사회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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