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앉혀 놓고...

by 하늘지기 posted Apr 1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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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긴 하루였다

종합시험이란 것을 이번으로 세 번째 응시했다
전공은 처음에 붙었었는데
부전공만 세 번을 보았다

그 결과가 발표되는 것이 바로 오늘, 2003년 4월 18일이다
결과를 확인하기 전까지의 24시간동안,
나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불합격이면,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지난 24시간만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 기간동안, 어쩌면 두 번째 불합격을 맞게 되었던 순간부터
나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24시간동안 온갖 생각을 다 했다
부모님께, 선생님께, 대중이형에게 성철이형에게
동생에게, 태혁이에게...
모두에게 각각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비참하다 못해 즐거울 정도로 짜릿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소리란 모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나 자신에게 무어라 말할 수 있을지였으니까...

정오가 되기 전부터
빗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비는 차마 울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하늘이 대신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비 덕분에 작심하고 울 수 있었던 적도 많았던 것이다
전화를 걸었지만 담당자가 없었다
빗소리는 자꾸 커지고 나는 자꾸 가라앉았다

음력 3월이 되면 근년간 나를 괴롭히던 삼재의 액운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에 유치할만큼 자꾸 매달리게 되었다
18일, 28일은 운수가 좋은 날이라는 소리가 자꾸만 극적으로 되새김질되었다

합격을 확인한 지금도 아주 상쾌하지만은 않다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매우 관대하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부여받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나의 길 위에 서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 원칙에 대한 믿음이나,
팔자와 사람이 뒤엉킨 가운데 가능성에 열정을 맡기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가치관까지도,
모두 전복될 수 있는 중대한 위기의 상황은 여전히 유효하다

2003년 4월 18일,
1994년 4월 18일, 세상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한히 존재하다고 생각하며 동료들과 차도 위를 달리던 때로부터 꼭 9년이 흘렀다
아홉, 빈 구멍들이 숭숭 남은 채로 채워지진 채워졌다

모르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제야 밥을 앉혀 놓았다
좋아하는 계란찜을 만들어서 김치와 먹은 후에는
나가서 비를 조금 맞고 와야 할 것 같다
빗물 섞인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나면
나를 포맷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