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올드보이

by 하늘지기 posted Feb 23, 200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올드보이 : 늙은 소년

소년이긴 하되 늙은 사람,
혹은 예전에 소년이었던 사람

문득 올드보이라는 영화를 서둘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Old Boy란 것이 무슨 소리인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흔히 OB로 줄여서 부르는... 가끔은 예비역이라고도 부르는 바로 그것인가?

택시를 탔다
처음 보는 사람과 어떤 구체적인 얘기들을 술술이 나눈다는 것은 참 재미난 일이다
그게 어쩌면 택시에 대한 내 가치부여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택시를 타고 행선지를 말한 후, 비적비적 대충 자세를 잡았다
30초 가량 지나고 나니 내 입에 목캔디가 있다는 사실이 슬쩍 거슬렸다
그래, 우린 알고 있지
내 입에만 무언가 들어있으면 옆 사람에게 괜한 미안함이 생기게 된다는 것
'아저씨 목캔디 하나 드실래요?' 라고 했더니
'좋지요, 먹는 거라면 뭐든지 좋지요. 여자도 좋고...'
깜깜한 택시 안에서 기사의 얼굴도 확인하지 않으면서 목캔디를 건넸다
여자 쫌 밝히는 젊은 기사겠거니... 하면서

그후 이런저런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그의 얼굴을 보았다
적당히 늙은, 하지만 늙은이는 아닌... 그런 얼굴이었다
또 갑자기 내 특유의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나이를 맞추어보겠다고 선언했다
대충대충 해서 하한선까지는 맞췄으나 정확한 나이는 말하지 못했다
뽀사시한 얼굴에 비해서 앞머리가 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앞머리가 남달리 부족한 사람에게는 나이 맞추기에 있어서 늘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까딱하면 열 살 이상의 오차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도 난 거의 근사값을 제출했다
'45세는 넘었으나 노인네는 아니군요'
기사 아저씨는 58년 개띠였다
그래 맞다, 띠를 거론하며 대화를 해본 일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58년 개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선입견은 있게 마련이다
그게 대한민국 58년 개띠들의 범사회적 위치이다

그때부터 기사님은 그야말로 '58년 개띠다운' 말빨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상세한 내용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게 58년 개띠다
자신이 58년 개띠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철저히 그답게 대응하는 것도 그들만의 특징인 것이다

요컨대 그는
올드보이였다, 늙은 소년이었다
늙은 아이라고 하는 편이 더 근사하겠다
택시를 타자마자 얼굴을 유심히 보고, 목캔디를 권할 때 다시 한 번 보고... 그랬더라면 아마 나는 정확히 그가 58년 개띠임을 맞췄을 것이다
그게 내가 갖고 있는 몇 안되는 이상한 능력 중이 하나다 -_-
그후 우리는 띠와 성격에 관련된 대화를 신나게 이어갔다

하여간 아무튼 어쨌거나
이렁저렁하여 집 앞에 도착하고, 커피를 뽑아와서 한 잔을 건넸다
그런데 커피를 고맙게 받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터기를 끄지 않았다
내가 커피를 뽑아오는 동안의 시간은 물론 그후 커피를 함께 마셨던 시간까지도 철저히 요금으로 계산되었다
이런 택시기사는 처음이다 정말
그의 말마따나
'한 번 물면 끝장을 보는' 개의 근성임 셈이다

내리기 직전, 드디어 나의 띠 토끼를 밝혔다
그랬더니 그는 대뜸 '63년?'이란다... ㅠ.ㅠ
그가 보기에 나는 '보이'가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말도 안돼, 내가 자기보다 다섯 살 밖에 적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다니.... -_-
어떤 사람들은 스물세 살까지도 보아주는데... 하여간 58 개띠들 단순한 건 알아줘야해... 라고 생각하며 째려보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생각하니 참 서운하다
나는 그를 '올드' '보이'로 봐주었는데,
그는 나를 '영' '맨'으로 본 모양이다
나의 판단이 관대했기 때문이지 뭘.... 이라며 넘어가려 해도 차마 씁쓸하다
도대체 나의 人生史적 위치는 어디란 말인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도 어른도 아닌, 대체 이 나라 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58년 개띠는 그랬다
단순하면서도 끈질긴 것 같았다
그런 확실한 성격이 부럽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
  • ?
    이감독이외다 2004.02.26 06:01
    음.. 오랜만에.. 강렬하게 네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글이었다..
    늙은 소년, 오십팔년 개띠, 인생적 위치, 근사값.. 항상 너에게 훈계받거나 주고받는 대화속에 피어나던
    근사했던 표현들이었다^^
  • profile
    하늘지기 2004.02.26 23:04
    그놈의 훈계....-_-;;
    내가 무슨 훈계를 그리 했었다고.... 공부 좀 시켰을 뿐인데

List of Articles
번호 날짜 제목 조회 수
53 2005.01.06 오늘은 나 기분이 별로인가봐 1 4562
52 2005.01.04 겨울이 좋은 이유 2 4852
51 2004.11.21 먼 길 3426
50 2004.10.04 중랑천 4220
49 2004.08.31 눈물 날 뻔 했다 3 4763
48 2004.08.23 습습후후 3692
47 2004.08.07 떠나고 싶다 3357
46 2004.07.10 베컴 인생이 꼬여가는 이유 4001
45 2004.07.04 찬란한 헤어스타일의 외국인 4963
44 2004.06.13 압박스러운 일상 3180
43 2004.05.20 까치가 낮게 나는 아침 3479
42 2004.05.05 그게 말이야 3451
41 2004.05.01 웬 떡이라니? 3 4396
40 2004.04.29 거미 콘서트를 보고 옴 3445
39 2004.04.05 10년 2 3507
38 2004.03.23 바쁘다 바빠 3453
37 2004.03.01 YMCA 야구단 1 file 3761
» 2004.02.23 올드보이 2 3700
35 2004.02.14 깜짝 놀라다 4 3326
34 2004.02.13 나대지 말자 2 339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Gogong.com All Rights Reserved.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