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이 한 번 넣어주는 게 뭐 그리 귀찮다고

by 하늘지기 posted Mar 2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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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전, 신호 위반에 걸려 딱지를 끊었다
노란불을 보고 교차로를 진입하면서 엑셀을 밟았으니 위법인 것은 분명하나 기분 나쁜 경찰의 행동에 아침부터 기분이 살짝 상했었다
분주한 출근시간대에 고가도로 기둥 옆에 숨어 있던 경찰차는
앞에 가던 차가 급히 차선을 바꾸는 바람에 주춤하던 내가 '노란불의 위기'를 헤쳐나가자 금새 뒤로 따라붙었다
창문을 내린 내게 다가와 대뜸 하는 말은 이랬다
"면허증 좀 주세요. 6만원!"
실례합니다, 신호를 위반하셨습니다 등의 기본적인 멘트도 없었다
인간적으로 약간 억울한 마음이 들어 '노란불이었었는데...'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위반한 것이 분명하므로 순순히 응했다
그런데 지갑에서 면허증이 잘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지갑을 통째로 건넸더니 거의 기겁(?)을 하듯 거부했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얘기했더니, 은밀히 뒷돈을 주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을 장면이라서 그랬으리란다
여하간 면허증을 꺼내어 주었고, 아주 익숙한 자세로 경찰은 통지서를 적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위반사항을 적을 쯤에 왔을까, 갑자기 내가 찬 안전벨트를 툭 치더니 이러는 것이다
"신호위반은 6만원에 벌점 15점인데 (벨트를 치며)이걸로 해드릴게요. 3만원!"
내가 무슨 시장에 반찬거리 흥정하러 왔나? 난 아무 코멘트도 하지 않았는데.... 거참...
"조심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면허정지 상황이 될 수도 있어요. 살살 다니세요"
라는 그 하늘색 옷 장사꾼의 마지막 말을 듣고 그 날의 해프닝은 끝이 났다

**
평소 나는 내 운전습관이 꽤 좋다고 생각했었고, 주변 사람들도 대략 그렇게 여기는 편이었다
어찌되었건 이번 일은 근래 들어 은근히 교만해진 운전습관에 대해 반성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다음 날부터 다시 모범적인 초보 운전자의 자세로 되돌아 가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어제 아침,
내 차선이 유난히 밀렸지만 참자 참자 하며 기다리고 서 있었다
일차선이었기 때문에 앞쪽의 유턴대기 차량들이 비스듬하게 서 있는 탓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앞에 공간이 생기기 시작하자 2차선에서 달려오던 소나타3(내 생각에 평균적으로 가장 난폭한 운전자들의 차량)가 내 앞으로 머리를 확 들이밀었다
미숙하면서 난폭한 운전은 정말 아찔하다. 접촉사고가 날 뻔한 순간이었다
거의 사용하지 않던 크락션을 눌렀지만, 쏘-쓰리는 아무 것 아니라는 듯 스르륵 내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후 나와 그는 계속 같은 길로 가게 되었다. 그것도 남들이 통상적으로 이용하는 길이 아닌 일종의 지름길을 말이지
지름길에는 대개 신호등이나 교차로 같은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각종 깜빡이를 켤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내 앞에 선 이 여인(!) 운전자는 핸들을 꺾을 때마다 깜박이를 넣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럴리 없겠지만 내가 자기를 일부러 따라가는 거라 여겼던 것일까
뒤에서 보니 불안하게 운전하는 폼이 완연했다
심지어 어느 모퉁이를 돌 때에는 뒷바퀴가 보도블럭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나는 반의도적으로 그 차를 바짝 따라 갔다. 물론 닿을 듯 말 듯한 정도가 아니라 일상적인 수준의 간격이었다
실은 따라 붙어서 위험한 추월을 시도하여 똑같이 복수할까도 했었다
아무튼 처음에 끼어들었을 때 진작 비상등을 한 번 켜 주었으면 서로 그렇게 갈등할 일 없었을 터인데,
무단히 저리 오바를 하고 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혹시 백미러로 나의 표정을 볼까 싶어서 나는 계속 포카페이스를 유지했다
학교 근처까지 와서 차선이 넓어졌을 때에 마침내 그녀와 나는 나란히 정지하게 되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진 않았다
다만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 여전한 포카페이스로 앞을 주시하기만 했다

모두 양보운전을 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상황이라면 '비상등 인사'라도 잘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