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 잘 가

by 하늘지기 posted Jun 3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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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친척들 중에서

외할아버지께 공식적으로 반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 우리 삼남매밖에 없을 것이다

외갓집이란 곳은 그런 곳이다

고모에게는 몰라도 이모에게는 반말을 계속 쓰게 되는 것이다

외사촌이 여럿 있기는 하지만 그 아이들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우리집과 외갓집이라는 두 개의 집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엄마가 같은 동네로 시집갔으니, 당연히 외갓집도 우리 동네에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친할아버지, 그리고 꽤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친할머니...

그래서 내게 할머니 할아버지란 자연스럽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다

어릴 적의 외갓집은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합법적 은신처였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 삶의 빚이란 것을 갚아야 한다면 당연히 일순위여야 할 공간이기도 하다

 

지난 주에 할배가 돌아가셨다

한창 시간에 쫓기던 터라 참 정신없이 상을 치러냈다

외삼촌은 아직도 시골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뒷일을 처리하고 있는 줄로 안다

 

숨을 멈춘 할배는 까만색이었다

염하는 것을 다함께 지켜볼 때에, 왜 이렇게 까맣냐면서 할매는 속상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렇게 한순간에 타버린 통나무처럼 되실 것이었으면서

말년엔 왜 그리도 할매를 못살게 구신 거냐면서 나도 속으로 할배한테 화를 냈다

보청기를 떼낸 상태라서 잘 들으셨을지도 모르겠다만

 

할배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일벌레 시골농부였다

천재지변은 당연히 상관없었고, 당신의 거동이 불편할 때에도 농삿일은 빈틈없이 계속되었다

이젠 일 좀 그만하시라고, 이번에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소나무로 태어나시라고 빌었다

사흘동안 여러 차례 절을 올릴 때마다 계속 그리 빌었으니 기도빨은 충분히 먹힐 줄로 믿는다

 

우리 동네와 우리 바다와 당신의 논과 밭이 모두 한눈에 보이는

공동산의 그 언덕에서

폼나는 소나무로 그렇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엄마 부탁대로, 할매 아픈 것도 텔레파시로 계속 좀 치료해주시고...

 

아, 하지만 너무 화가 난다

이건 뭔가 너무 정리가 안되는 상황이다

그래도 난 씩씩하게 인사할 거야

어차피 정리가 안되는 건 남은 사람의 사정인 것이고

할배는 어서 빨리 소나무로서의 삶을 시작해야 하니까

 

할배, 잘 가

우리 할배여서 고마웠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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