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하얀 차

by 하늘지기 posted Jun 0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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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한가운데에서,
또 담배가 떨어져버렸다
아파트만 줄줄이 있는 우리동네에는 편의점이 없으니 오늘도 천상 이웃동네에 다녀와야 했다

한 달 전에 넣은 기름이 아직도 오분지 일이나 남아있는 내 차는
최근에 탄 일이 거의 없다보니 주차장의 안쪽 구석에서 잘 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새벽시간에는 모든 차들이 들어와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가로주차 세로주차 무대뽀주차까지 한 대가 더 들어갈 틈도 없다
더구나 우리동은 가운데에 끼여있다 보니 다른 동에 비해 주차공간이 훨씬 좁다

내 차 뒤에 가로주차된 빨간 차를 밀어내고 난 후
조심조심 차를 빼냈다
전진 후진 좌로 우로 깔짝깔짝거리기를 한참 해야 빼낼 수 있다

라디오를 크게 켜고 출발을 하려는데 30미터 전방에
아까부터 서있던 하얀 차의 라이트가 여전히 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내가 빠진 자리에 들어오려고 대기하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자리를 빼앗기면 돌아왔을 때 세울 곳이 없을텐데...-_-

허나 어쩔 수 없다
이대로 다시 차를 집어넣는 것은 기다린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겠고,
고작 그 정도에 사나이의 호방함을 잃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내 자리요! 하면서 빨간 차를 반대로 밀어서 막아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창문을 열고 호쾌하게 하얀 차의 옆을 지나쳐서 갔다

돌아와 보니 역시 그 하얀 차가 원래의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그런데 자꾸만 얄밉다는 기분이 든다
어느 쪽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자꾸만 얄미워진다

지금 내 차는 낯선 옆동의 긁히기 쉬운 위치에 가로로 주차되어 있다
내일 나가서 다시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아야겠지...
그러면 나는 그 핑계삼아 상가의 자판기 커피를 마시러 나갈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