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막걸리

by 하늘지기 posted Feb 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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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처음으로 링거(세칭 닝겔)를 꽂았다

몇년 전부터 명절 때가 되면 난 으례히 운짱 노릇을 하였고
최소한의 음복이나 새배 후에 받아마시는 것 외에는
술을 거의 먹지를 않는다
아침 일찍 우리집에서부터 시작되는 차례를 모두 마치고 나면 오후 두세시가 넘어버리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전날과 그날 저녁에 퍼다 붓는 것이다

이번 설날도 그렇게 잘 보내고 저녁이 되었는데
배가 살살 아파왔다
시골 동네인데다가 휴일이다보니 소화제 한 알 구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대신 까스활명수를 두 병이나 사다 마시고
양쪽 엄지손가락을 따고
싸라기 내리는 동네를 조깅하기도 하였지만
영 진전이 없었다
결국은 데굴데굴 구르다 참지 못해 병원에 가게 되었다

방금 도착했기 때문에
거의 유일하게 술을 마시지 않은 막내이모부의 차에 타고
30분여 거리의 병원에 갔다

진찰결과는... 서울 가면 정밀검사를 받아봐라...-_-
그러고는 주사와 약을 주고는 가라고 한다
주사 맞고 약 먹으면 좀 진정이 되려나 싶어서 앉아있어 보는데
갈수록 더 아파온다
당장의 통증이 전혀 진정되지 않는데... 주사 맞고 약 먹고 가라니...썅... 내가 무슨 약국엘 왔나?

결국은 태어나 처음으로 링거를 꽂고 누웠다
하지만 점점 더 아파온다...
더 먼 곳의 종합병원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나의 의견을 말했다
헌데 엄마가 지금 병원으로 오고 있으니 기다렸다가 결정하기로 하고서는
혹시나 해서 화장실에 갔다
링거를 꽂은 채로 거사를 시도했으나 허사였다
그 대신 갑자기 오바이트가 쏠려왔다
오바이트라면 내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옳커니 모두 뱉어내 버리자...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쏟았다
역시나 난 오바이트를 참 잘 하더라

아무래도
처음에 처방해준 주사와 약이 오바이트를 일으킨 모양이다
적잖은 오바이트를 한 후에야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링거를 꽂은 채로 집으로 돌아오고... 그 후로는 몇 시간동안 끙끙거리며 밤을 보내야했다
초저녁부터 그렇게 누워서 앓느라고 잠도 많이 잤을텐데
오늘 하루종일 운전하며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전에 없이 피곤했던 것도 물론 그 탓이겠지

종합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처방은
그 시골병원의 의사가 아니라 해도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대신 나는 나만의 처방을 내릴 수가 있었다
조속히 정밀검사를 받되(아예 종합검진을 받아야 할 모양이다. 문제는 장 뿐이 아니라 신장계열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하니... 당연히 폐나 간, 위... 이것들도 정상일리는 없겠고...아씌...ㅠㅠ)
우선은 막걸리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11월 초에 이번처럼은 아니지만 배가 오랫동안 아팠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먹은 술이 그 유명한 세칭 막-맥-소 조합이었다
맥주와 소주의 조합은 흔히 즐거는 것이지만
막걸리는 다른 술들과 굉장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는 느낌을 전부터 갖고 있었고
그날 복통의 원인도 막걸리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이번 설날에 먹은 술 역시 막걸리였다
물론 운짱이라서 딱 한 잔만 먹었지만
약 한 시간 후 아무 생각없이 소주 한 잔과 섞어버렸던 것이다
소량의 배합이었지만 아마도 그게 각종 튀김류에 힘입어 주요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고 보면 몇 주전 밤새도록 배앓이를 하면서 술병이라고 여겼었던 그 날도
막걸리는 아니지만 굉장히 엽기적으로 많은 종류의 술을 섞어 마셨던 걸로 기억이 된다

아직 속이 제대로 진정되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좀 전에 위험한 시도를 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집에 들어오기 전에 태릉갈비를 먹으러 갔다
나름대로 양껏 먹었는데 아직 속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래 맞어, 분명 문제는 막걸리야 -_-

일단, 막걸리를 피하자
언제나 그리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맛있는 막걸리를 피해야 한다
좋은 것을 금지당하게 되는 건 참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