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탕욕하기

by 하늘지기 posted Oct 1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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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하나를 온전하게 뻗을 만한 사이즈도 못되지만
그래도 집에서 탕욕을 할 수 있다는 건 참 복된 생활환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탕욕은 아무래도 목욕탕에서, 이왕이면 온천에서 즐기는 것이 제격이다
목욕탕 가는 것조차 귀찮을만큼 피곤할 때에 몸을 담그고 싶다면 그때 집에서 탕욕을 하는 것이다
배부른 소리이겠으나, 그것은 순전히 집의 욕조 사이즈가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욕조 바닥 두껑을 막아놓고 가장 뜨거운 물을 틀었다
물이 2/3 가량 채워졌을 때에 슬쩍 손으로 찔러보았다
당연히 너무 뜨거웠고, 그때부터 가장 차가운 물을 흘려넣었다
발을 담궈도 웬만큼 견딜만한 온도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 쉽게 발을 담글 수 있는 온도라면 그건 목욕하는 재미가 아니다
뜨거워서 겨우겨우 들어갈 수 있어야 비로소 탕욕을 하는 맛이 나는 것이다
그럭저럭 한 발씩 한 발씩, 하체와 상체가 모두 물 속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초반 10초 가량은 좀 얼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는 더이상의 찬물 공급을 막았어야 했다
이제 그만 찬물을 끊더라도 내 몸은 서서히 뜨거운 물에 적응을 할 것이 분명한데
나는 왜 여전히 찬물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가...

생각하면 늘 그런 식이었다
분명히 견딜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차선책을 끼고 있으면서 안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니 사는 게 이리 미지근한 것이다
참 어리석다

그렇듯 갑자기 나 자신이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다시 뜨거운 물을 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소 잃은 후에 고쳐놓은 외양간은 남들 보기에만 멀쩡할 뿐이다
그게 어쩌면 나의 실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