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토론 생중계를 보지 못했습니다. 긴히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밤이 깊어서야 인터넷으로 다시 보았습니다. 소감을 압축하자면 딱 한 단어뿐입니다. '참담합니다.' 이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대한민국 검사들의 교양 수준이 참담할 정도로 낮습니다. 독일인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양이란 사회를 복잡한 개인의 내면에 비추어보고, 또 그렇게 하여 사회를 결속시키는 도덕적 구속력을 내면에서 생성해내는 개인적인 능력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교양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 결과에 따라 실천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검찰과 국민 사이의 관계는 '불신'입니다. 검찰이 권력을 남용하며 검사들이 특권을 누린다는 불신. 가진 자 힘있는 자에게는 비굴하지만 약한 자에게는 냉혹하다는 불신. 그래서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검찰이 짓밟아 왔다는 불신입니다. 검찰개혁은 국민과 검찰의 관계를 불신에서 신뢰로 바꾸는 것입니다.
어제 평검사들은 두 시간 내내 쉼 없이 노래불렀습니다. 검찰인사위원회를 설치하라. 검찰 인사권을 검찰총장에게 넘기라. 그렇게 하면 검찰과 국민의 관계가 불신에서 신뢰로 전환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이것은 성찰적 능력의 결여, 교양의 결여에 대한 너무나 뚜렷한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30대 평검사들이 저럴진대 검찰 간부들의 교양 수준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대한민국 검사들은 국민들과의 교신망을 끊고 살아온 모양입니다.
둘째, 대한민국 검사들의 권력욕과 특권의식이 참담할 정도로 강합니다. 감기에 걸린 아내를 돌보지 못하는 남자가 어디 한둘입니까? 어느 검사의 아내가 폐렴에 걸려 사망한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곁에 있으면 폐렴이 낫습니까? 남편이 곁에 있고 없음과 아내의 폐렴 사이에 어떤 생물학적 생리학적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검사가 격무 때문에 아이를 챙기지 못해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문제이겠지만 성인인 검사의 아내가 남편이 곁에 없어서 폐렴에 걸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어느 여검사가 출산 직전까지 쉬지 못하고 근무했다는 것 역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삭의 여검사에게 산전휴가를 제공할 권한과 책임은 검찰 자신에게 있습니다.
게다가 검사들의 격무는 검찰이 자초한 일입니다. 사소한 범죄에 대한 수사권을 넘겨달라는 경찰의 요구조차 완강하게 거절한 것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검사들 자신 아닙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막강한 권력집단인 검사들이 대통령에게 검찰을 따뜻하게 보듬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서 그 검사들에게 쫓기고 박해받은 한총련 수배자와 구속된 양심수 가족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 호소를 하기 전에 검사들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특권의식과 권력욕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대한민국 검사들의 나약함과 무책임성이 또한 참담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언론인들이 감옥에 가고 해직을 당하면서 스스로 언론자유를 지켰듯이 검사도 스스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검사들은 모두 정상적인 능력을 가진 성인입니다. 누군가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면 그에 맞서야 정상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하는 불이익이래야 한직으로 밀려나는 것,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 정도입니다.
검사들의 '외압타령'은 그게 무서워서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주장입니다. 국가에서 단 한 푼도 받지 않는 언론인과 학생들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해직과 투옥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지난 반세기 동안 검사들은 보직과 승진의 불이익을 감수할 용기가 없어서 외압에 굴복했다는 자백을 검사들은 한 것입니다. 나쁜 친구가 협박해서 학교를 빼먹었는데 왜 나만 패느냐는 항변은 저의 귀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당신들, 어른 맞아? 대한민국 검사들이 이토록 나약하고 무책임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넷째, 대한민국 검사들의 무례함이 저를 참담하게 만듭니다. 검사들은 대통령과 장관에게 말을 적게 하고 자기네 말을 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 내내 그들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인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인사권을 검찰총장에게 넘겨라. 이것 하나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타령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주제와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는 데 썼습니까?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느라 허비한 시간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저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뒷골목 담벼락에 보기 흉하게 써 놓은 다음과 같은 낙서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낙서하지 맙시자."
50명의 검사 가운데 정말 붙잡힐 각오를 하고서 유인물을 돌리거나 돌맹이를 던져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네가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다면서 늘어놓은 그 '386 장광설'은 단 한 마디도 건질 것이 없는 시간낭비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강금실 장관에게 '점령군'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 것을 요구했고, 대통령에게도 '검찰에 대한 문민통제'라는 표현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고 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국민들이 보고 있다고 하면서도, 대통령이 검사한테 전화를 한 옛날 일이나 노건평 씨의 소위 '인사개입'에 대한 언론보도를 들먹였습니다. 검사들에게는 극복하기 어려운 직업병이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만과 무례함'이라는 질병입니다.
대한민국 검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제가 보건대 그들은 '자기만의 사명감'으로 삽니다. 천박한 교양, 특권의식, 나약함, 무책임성, 무례함, 오만, 이런 것으로 범벅이 된 '검사들만의 사명감'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는 법언은 이런 '자기만의 사명감'과 어울리는 범위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검사들에 대한 저의 비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검사들 중에 누군가 이 편지를 본다면 반론을 주십시오. 토론하겠습니다. 대통령하고는 토론하지만 저같은 원외 정치인과는 토론 못하겠다고요? 그러진 않으시겠죠. 원하신다면 MBC백분토론이나 KBS심야토론에서 만날 의사도 있습니다. 제가 백분토론 진행할 때 검찰개혁 문제로 몇 번씩이나 현직검사를 패널로 모시려고 노력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당당하게 나오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강금실 장관에 대한 기억 한 토막입니다. 1984년 제가 대학에 복학해서 후배들의 학생회 부활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중에 후배들 몇이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붙들려 갔습니다. 막 학원자율화 조처가 나온 터라 구속은 되지 않겠지만 구류 29일 정도는 받을 것으로 보고 사식 넣을 채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후배들 셋이 모두 학교에 나타났습니다. 다음은 제가 그 후배들과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어떻게 나왔냐?" "훈방되었어요. 새벽에 즉심판사가 와서 돌 던졌냐고 묻기에 안 던졌다고 했죠. 서류를 보더니 증거가 없으니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 판사 이름 뭐냐?" "기억 안 나요. 근데 여자예요." "혹시 얼굴 동그랗고 생머리 길게 한 예쁜 여자 아니었니?" "맞아요." "강씨 아니더냐?" "맞아요, 강씨." "강금실이지?" "맞아요, 강금실!" "너네 운수 대통한 줄 알아라."
강금실 장관은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은 살이 빠져 날카로워 보이지만 그때만 해도 둥근 얼굴에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잘났다는 남자들이 독재정권의 요구에 고분고분 응하면서 구속학생들에게 정찰제 징역형을 선고하던 시절에 강금실은 법관으로서 자기가 할 일을 정확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받은 불이익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시국사범을 만날 일이 없는 가정법원으로 '좌천'된 것입니다. 이런 저런 협박 회유도 많이 받았겠죠. '다친다'는 말도 숱하게 들었을 겁니다.
386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검사들 가운데 강금실의 법무장관 자격에 시비를 걸 권리를 가진 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를 '정치인'으로 규정하고 '점령군'이라며 거부감을 표출할 권리를 가진 검사도 물론 없습니다. 강금실 장관은 철저한 법률가입니다. 판사일 때는 판사로서, 변호사일 때는 변호사로, 법무부장관이면 장관으로서 자기가 할 일을 정확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검사들에게 권합니다. 강금실에 대한 호불호를 따지기 전에 먼저 강금실을 배우라고. / 유시민
출처 : 유시민 홈페이지 www.usimin.net
첫째, 대한민국 검사들의 교양 수준이 참담할 정도로 낮습니다. 독일인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양이란 사회를 복잡한 개인의 내면에 비추어보고, 또 그렇게 하여 사회를 결속시키는 도덕적 구속력을 내면에서 생성해내는 개인적인 능력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교양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 결과에 따라 실천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검찰과 국민 사이의 관계는 '불신'입니다. 검찰이 권력을 남용하며 검사들이 특권을 누린다는 불신. 가진 자 힘있는 자에게는 비굴하지만 약한 자에게는 냉혹하다는 불신. 그래서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검찰이 짓밟아 왔다는 불신입니다. 검찰개혁은 국민과 검찰의 관계를 불신에서 신뢰로 바꾸는 것입니다.
어제 평검사들은 두 시간 내내 쉼 없이 노래불렀습니다. 검찰인사위원회를 설치하라. 검찰 인사권을 검찰총장에게 넘기라. 그렇게 하면 검찰과 국민의 관계가 불신에서 신뢰로 전환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이것은 성찰적 능력의 결여, 교양의 결여에 대한 너무나 뚜렷한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30대 평검사들이 저럴진대 검찰 간부들의 교양 수준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대한민국 검사들은 국민들과의 교신망을 끊고 살아온 모양입니다.
둘째, 대한민국 검사들의 권력욕과 특권의식이 참담할 정도로 강합니다. 감기에 걸린 아내를 돌보지 못하는 남자가 어디 한둘입니까? 어느 검사의 아내가 폐렴에 걸려 사망한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곁에 있으면 폐렴이 낫습니까? 남편이 곁에 있고 없음과 아내의 폐렴 사이에 어떤 생물학적 생리학적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검사가 격무 때문에 아이를 챙기지 못해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문제이겠지만 성인인 검사의 아내가 남편이 곁에 없어서 폐렴에 걸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어느 여검사가 출산 직전까지 쉬지 못하고 근무했다는 것 역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삭의 여검사에게 산전휴가를 제공할 권한과 책임은 검찰 자신에게 있습니다.
게다가 검사들의 격무는 검찰이 자초한 일입니다. 사소한 범죄에 대한 수사권을 넘겨달라는 경찰의 요구조차 완강하게 거절한 것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검사들 자신 아닙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막강한 권력집단인 검사들이 대통령에게 검찰을 따뜻하게 보듬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서 그 검사들에게 쫓기고 박해받은 한총련 수배자와 구속된 양심수 가족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 호소를 하기 전에 검사들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특권의식과 권력욕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대한민국 검사들의 나약함과 무책임성이 또한 참담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언론인들이 감옥에 가고 해직을 당하면서 스스로 언론자유를 지켰듯이 검사도 스스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검사들은 모두 정상적인 능력을 가진 성인입니다. 누군가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면 그에 맞서야 정상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하는 불이익이래야 한직으로 밀려나는 것,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 정도입니다.
검사들의 '외압타령'은 그게 무서워서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주장입니다. 국가에서 단 한 푼도 받지 않는 언론인과 학생들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해직과 투옥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지난 반세기 동안 검사들은 보직과 승진의 불이익을 감수할 용기가 없어서 외압에 굴복했다는 자백을 검사들은 한 것입니다. 나쁜 친구가 협박해서 학교를 빼먹었는데 왜 나만 패느냐는 항변은 저의 귀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당신들, 어른 맞아? 대한민국 검사들이 이토록 나약하고 무책임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넷째, 대한민국 검사들의 무례함이 저를 참담하게 만듭니다. 검사들은 대통령과 장관에게 말을 적게 하고 자기네 말을 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 내내 그들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인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인사권을 검찰총장에게 넘겨라. 이것 하나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타령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주제와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는 데 썼습니까?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느라 허비한 시간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저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뒷골목 담벼락에 보기 흉하게 써 놓은 다음과 같은 낙서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낙서하지 맙시자."
50명의 검사 가운데 정말 붙잡힐 각오를 하고서 유인물을 돌리거나 돌맹이를 던져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네가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다면서 늘어놓은 그 '386 장광설'은 단 한 마디도 건질 것이 없는 시간낭비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강금실 장관에게 '점령군'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 것을 요구했고, 대통령에게도 '검찰에 대한 문민통제'라는 표현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고 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국민들이 보고 있다고 하면서도, 대통령이 검사한테 전화를 한 옛날 일이나 노건평 씨의 소위 '인사개입'에 대한 언론보도를 들먹였습니다. 검사들에게는 극복하기 어려운 직업병이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만과 무례함'이라는 질병입니다.
대한민국 검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제가 보건대 그들은 '자기만의 사명감'으로 삽니다. 천박한 교양, 특권의식, 나약함, 무책임성, 무례함, 오만, 이런 것으로 범벅이 된 '검사들만의 사명감'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는 법언은 이런 '자기만의 사명감'과 어울리는 범위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검사들에 대한 저의 비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검사들 중에 누군가 이 편지를 본다면 반론을 주십시오. 토론하겠습니다. 대통령하고는 토론하지만 저같은 원외 정치인과는 토론 못하겠다고요? 그러진 않으시겠죠. 원하신다면 MBC백분토론이나 KBS심야토론에서 만날 의사도 있습니다. 제가 백분토론 진행할 때 검찰개혁 문제로 몇 번씩이나 현직검사를 패널로 모시려고 노력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당당하게 나오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강금실 장관에 대한 기억 한 토막입니다. 1984년 제가 대학에 복학해서 후배들의 학생회 부활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중에 후배들 몇이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붙들려 갔습니다. 막 학원자율화 조처가 나온 터라 구속은 되지 않겠지만 구류 29일 정도는 받을 것으로 보고 사식 넣을 채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후배들 셋이 모두 학교에 나타났습니다. 다음은 제가 그 후배들과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어떻게 나왔냐?" "훈방되었어요. 새벽에 즉심판사가 와서 돌 던졌냐고 묻기에 안 던졌다고 했죠. 서류를 보더니 증거가 없으니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 판사 이름 뭐냐?" "기억 안 나요. 근데 여자예요." "혹시 얼굴 동그랗고 생머리 길게 한 예쁜 여자 아니었니?" "맞아요." "강씨 아니더냐?" "맞아요, 강씨." "강금실이지?" "맞아요, 강금실!" "너네 운수 대통한 줄 알아라."
강금실 장관은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은 살이 빠져 날카로워 보이지만 그때만 해도 둥근 얼굴에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잘났다는 남자들이 독재정권의 요구에 고분고분 응하면서 구속학생들에게 정찰제 징역형을 선고하던 시절에 강금실은 법관으로서 자기가 할 일을 정확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받은 불이익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시국사범을 만날 일이 없는 가정법원으로 '좌천'된 것입니다. 이런 저런 협박 회유도 많이 받았겠죠. '다친다'는 말도 숱하게 들었을 겁니다.
386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검사들 가운데 강금실의 법무장관 자격에 시비를 걸 권리를 가진 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를 '정치인'으로 규정하고 '점령군'이라며 거부감을 표출할 권리를 가진 검사도 물론 없습니다. 강금실 장관은 철저한 법률가입니다. 판사일 때는 판사로서, 변호사일 때는 변호사로, 법무부장관이면 장관으로서 자기가 할 일을 정확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검사들에게 권합니다. 강금실에 대한 호불호를 따지기 전에 먼저 강금실을 배우라고. / 유시민
출처 : 유시민 홈페이지 www.usimi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