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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야
2002.04.29 11:14

엄마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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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소원

"자, 다음은 6학년생들의 어머니와 함께 달리기입니다.
선수들은 어머니와 함께 출발선에 서 주시고 출발 후에는
저 앞 반환점에 놓인 쪽지에 적힌 지시대로 하여 주십시오."
높은 가을 하늘 아래 형형 색색의 오색 풍선과 화려한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 위로 선생님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 줄의 아이들이 출발 총소리와 함께 달려나갔다.
나는 발끝을 출발선에 맞추고 심호흡을 한 다음 손을 꼭 잡은 채로
약하게 떨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붉게 상기된 엄마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같았다.
나는 손에 힘을 주며 씨익 웃어 보였다. 선생님의 손이 높이 올랐다.
침을 꿀꺽 삼켰다.
"타앙!"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아끌며 힘껏 앞으로 내달렸다.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반환점까지는 우리가 일등이다 싶었다.
나는 야구선수가 멋지게 도루를 하는 모습으로 미끄러지며
한 손으로 운동장 바닥에 있는 쪽지를 펴들었다.
'엄마가 학생 업고 달리기'
순간 쪽지를 본 엄마가 당황한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어떻게 할 거냐는 눈짓이었다.
나는 재빨리 엄마 앞에 등을 돌리며 앉았다.
"내가 엄마 업을께. 빨리!"
"호, 호준아."
"엄마, 빨리!"
엄마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내 등에 몸을 기댔다.
나는 두 손으로 힘껏 엄마를 추스려 업은 다음 앞으로 내달렸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등으로 느껴지는 엄마의 뺨은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각자의 쪽지에 따라 자기 엄마의 손을 잡고 뒤로 달리는 아이,
객석에서 앉아있던 할머니 손을 이끄는 아이, 미처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주저하고 있는 아이들을 제치고 우리는 맨 앞으로 달려나갔다.
누군가 관중석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 앞이 흐려져왔다.
"야, 곱추다."
그랬다. 엄마는 곱사등이였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업을 수가 없었던거다.
골연화증으로 등뼈가 기형적으로 휘는,
그러나 그런 의학적인 설명도 필요없이 한 단어로 쉽게 이해가 되는,
말 그대로의 곱사등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엄마를 꼽추라고 부르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불렀다. 병신이라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남들에게 전염되는 것도 아닌데
단지 남들에게 보기 흉하다는, 그래서 내가 창피라도 당할까봐
하루 종일 늘 방 안에서 바느질감을 만지며 나를 기다리는 게
엄마의 유일한 낙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날 낳아준 엄마가 아니었다.
당신 몸도 불편하면서 집앞에 버려진 고아인 나를
친자식처럼 입히고 먹여준, 그렇게 착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를 온동네 사람이 다 모인 학교 운동회에 같이 오자고
죽기살기로 떼를 썼던 것은 자연스레 사람들을 대하다보면
좀 나아질 거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은혜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보은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그 무언가를 닦아내고 나니
눈 앞에 선생님이 와 계셨다.
나는 가쁜 숨을 고르며 선생님을 쳐다 보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님의 눈가에 물기가 반짝거렸다.
"선생님, 우리 엄마에요."
엄마는 내 등에 업힌 채로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날 우리는 결국 1등을 했고
그 어느 팀보다 우렁찬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부상으로 받은 공책 세 권과 팔뚝에 찍힌 1등 도장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운동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
"호준아, 널 한 번만 업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날 이후 시간은 흘러 갔다.
엄마를 아무리 이해하려 했다 하더라도 자연스레 찾아오는
사춘기의 반항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이후에는 나도 적잖이
엄마의 속을 썩였다.
이제야 겨우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 엄마를 제대로 모실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간 직장 때문에 객지 생활을 하느라 바쁜 일과를 핑계로
연락도 자주 하지 못했는데, 사무실동료들과 늦은 술자리를 하는 중에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과 지금 업무 중이니 나중에 전화를 다시 하겠다고
서둘러 끊으려는데 엄마가 주저했다.
"5분만 이야기를 할 수 없겠니?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했다."
그러나 그런 엄마의 바람에도 나는 바쁘다는 말 한마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게 엄마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거라곤 상상도 못한채.
그렇다... 지난 주 화요일 우리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주워다 기른 아들의 겨울을 걱정하며 어두운 눈으로 며칠을 걸려 짠
털 스웨터 한 장을 달랑 유품으로 남기고 엄마는 그렇게 가셨다.
꼭 한번만 날 업어 봤으면 좋겠다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선천성 구루병 환자의 수명은 남보다는 짧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의사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 통화, 내 술자리와 바꿔 버린
엄마의 한마디는 나를 더욱 후회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으셨던 말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난 엄마를 그렇게 보내버릴 수는 없었다.
때를 즈음해 내린 비로 산 중턱은 제법 추웠다.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아 떼를 옮겨 심은 사이로 벌건 흙이
그대로 다 드러나 보였다.
엄마의 휘어진 등처럼 둥그런 봉분의 흙을 다독거리며 나는 천천히
그 흙 위에 몸을 엎드렸다.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엄마, 나 왔어. 춥지 않아? 비가 와서 그래... 내가 돈 더 벌어서 따뜻한 데로 옮겨줄게. 엄마 기억나? 엄마 소원... 나 업어보는 거랬지? 나 지금 이렇게 엄마 등에 업혔어. 무겁지? 이제서야 엄마 소원 이뤄주게 됐네? 엄마…기분좋아? 엄마 소원 이뤄서 기쁘지? 엄마…기쁘지…? 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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