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에게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스승께서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나에게 <관허(觀虛)>라는 호까지 지어 주셨건만
살아가다 보면
평상심이 흔들려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또한 내 자신을 경계하는 의욕이 지나쳐
본질은 저 밖에 있는데
쓸데없는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때도 있습니다.
교종과 선종을 비교 설명하던 책의 일부분입니다.
선사와 법사가 길을 가고 있었다.
탁발행을 나섰다가 산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강물이 불어 다리가 잠겨 버렸다.
한 여인이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법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음을 야무지게 다져먹으며 애원 가득한 여인의 눈길을 애써 피한다.
용맹정진의 길에 여체와의 접촉은 당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강물을 건너야 할양이면 저 여인은
필경 어둠이 내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저 자리를 지켜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돼. 이 함정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구. 이 고비를 넘겨야지.
갈등을 애써 누르는데 돌연한 일이 벌어진다.
선사가 여인을 덥석 업더니 물에 잠긴 다리를 첨벙첨벙 건너는 것이다.
고맙다고 몇 번이나 허리를 꺾는 여인에게
가벼운 목례로 답하고 그 선사는 걸음을 재촉한다.
잠시 아연했던 법사가 입술에 맴돌면 이 말을 기어이 뱉는다.
“부녀자를 업고 강 건너는 일이 수도자의 행신으로 합당한 일이던가요.”
하지만 선사는 묵묵부답이다.
그냥 걷기만 한다.
그러자 법사의 음성은 이제 다그치는 기색으로 변한다.
“그대가 중한 계율을 깨고 말았으니 이걸 어찌 수습하리오.”
뒤돌아보며 선사가 나직이 답한다.
“나는 강가에 여인을 내려두고 왔지만 그대는 아직도 마음에 지닌 채 걷고 있구려.
정녕 계율이 무섭거든 여인을 이제 그만 내려놓으시구려.”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
드러나지 않는 내면까지도 스스로 자정하는 마음
타성에 빠지지 않고 늘 나를 새롭게 하려는 마음
그런 마음이 지금 내게 필요합니다.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서
노승이 주인공에게 던진 질문의 답에서
나의 문제의 답도 함께 구해질 수 있겠지요.
여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어지는 병이 있네.
조그만 새 한 마리를 집어넣고 키웠지.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겠는데 그 동안 커서 나오질 않는구먼.
병을 깨뜨리지 않고는 도저히 꺼낼 재간이 없어.
그러나 병을 깨서는 안 돼.
새를 다치게 해서두 물론 안 되구.
자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K씨!
한 번 풀어 보시겠어요?
K씨라면 이미 답을 알고 계시겠죠?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달리 먹지 않는 다음에는...
애초에 그러한 조건들을 붙이지 않으면 될테지만,
그건 너무 비겁한 결론이고...
차라리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새를 왜 그 안에 넣었느냐고,
넣을 때는 언제이고 왜 이제 와서 타인에게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과오에 대한 답을 구하느냐고,
그렇게 묻겠습니다
일체유심조,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느냐... 하는 말, 그것 참 비겁한 소리죠
새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왔을 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소리죠
새는,
병이 깨져서 다치는 것을 두려워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상의 아픔을 이미 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판단과 결정의 권한이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여기는 그러한 잔인한 시험의 태도에서 어찌 마음을 비웠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