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서편제를 다시 보았는데, 판소리 배경음악이 영화 전반에 걸쳐 들린다는 것을 빼곤 사실 기억이 흐릿했었다. 두 번째 감상을 통해서 집중한 것은 먼저 작품 배경이었다. 작금의 전통예술의 흥망은 사실상 영화에서 그려낸 것처럼 해방 직후의 시기에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물론 일제강점이 원인이지만) 서편제를 찍을 당시만 해도 자국의 문화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으니 말이다. 꽤 오래된 영화임에도 현대랑 다를 바 없는-오히려 심화된 소리꾼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인상 깊었다.
여인을 잃고 송화와 동호에게 소리를 가르치던 유봉이 옛 동문이었던 친구의 공연을 보여주고 친구들과의 만남에선 유봉의 분노와 회한만 드러난 채 헤어지지만,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 약에 취해 사는 친구를 발견하게 된다. 외길을 간 사람과 현실에 타협해 녹아든 사람 모두 씁쓸한 현실을 맛보고 산다는 점이 내게 찝찝한 기분을 느껴지게 했다.
한을 담은 서편소리를 완성했을 때 송화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아버지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고 끄덕이는 장면은 꽤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피는 안 섞였지만)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기에 평생 아버지의 뜻에 따라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수동적이기 만한 송화는 유봉이 죽은 뒤에도 묵을 곳을 찾아다니며 연명하는 느낌이다. 만약 그녀가 눈을 잃지 않았어도 명창의 길을 찾아가진 않았을 것 같다. 그녀 자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가족뿐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동호와 송화의 재회도 인상깊었다. 서로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창자와 고수로써 밤새도록 소리를 하는 것만으로 묵은 한을 풀어냈다는 것이 영화를 볼 땐 답답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남매의 화합은 어떻게든 송화가 이룬 소리에 영향을 끼칠 거라는 것, 또 현실적으로 송화가 얹혀살게 될 것이므로 장님이 된 송화에겐 지금처럼 유랑하는 상황과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점 때문에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