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저포기
시대를 막론하고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라남도 남원에 사는 양생 또한 어렸을 적 부모를 잃어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하였다. 그런 양생과 이름 모를 여인의 인연을 맺어 준 것은 현실적인 인물인 중매인이 아닌 초현실적인 부처다. 옛 어른들이 혼인을 할 때 미리 사주를 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혼사는 지금의 단순한 결혼과 다르게 불교나 도교와 같은 종교적 색채가 결합하여 ‘인연을 맺는 의식’과 같이 여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의 마음을 남성이 여성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양생이 여인의 부모를 만나기 전까지 여인은 스스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혼령임을 밝히지 않았고 양생은 기이하게 여길 뿐 여인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여인의 부모를 만나 여인을 잊지 말아달라며 재물까지 받게 되니 다시 혼인할 염두가 날까 싶다. 어쩌겠는가, 산에 들어가 약초나 캐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 수 밖에...
이생규장전
요새는 남성과 여성의 연애관계의 집중정도를 두고 ‘초식’과 ‘육식’이라는 말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초식남’, ‘초식녀’와 같이 성별 앞에 초식이 붙을 경우 관계에 소극적인 것을 뜻하며 반대로 ‘육식남’, ‘육식녀’와 같이 성별 앞에 육식이 붙을 경우 관계에 보다 적극적임을 뜻한다. 고전소설에서 대개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대개 남성에게 육식, 여성에게 초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이생규장전은 다르다! 귀족가문 여식 최랑은 연서로 이생을 늦은 저녁 집으로 꼬신다. 이생은 머리칼이 곤두서고 봄소식이 새어나갈까 걱정하는 남성의 모습을 보이지만 대조적으로 최랑은 당당하게 이생과의 인연을 맺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인다. 후의 최랑과 이생의 관계가 들킨 후에도 소극적으로 을주로 내려가는 이생과 다르게 최랑은 부모에게 맞서며 이생과의 혼사를 주장한다. 이와 같은 적극성과 소극성의 대비는 왜적에게 달아나 목숨을 부지하는 이생과 사로잡혀 꾸지는 최랑의 모습, 피할 수 없는 저승길에 맞서 이생과의 인연을 살기 위해 혼으로 이생과 살다가 끝내 황천으로 가는 최랑과 최랑에게만 집착하여 세상일에 인연을 끊고 최랑이 저승으로 돌아가자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는 이생의 모습으로 작품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사랑에 적극적인 최랑의 모습에 많은 애정을 느낀 작품이다.